야구선수가 될 뻔한 축구선수
박지성이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운동부가 야구부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했고 '박지성이 축구를 안 했다면 무슨 일을 했을까요?'라는 질문에 박지성의 아버지는 회사원이나 야구선수가 되었을 거라고 직접 언급을 하기도 했다.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야구를 많이 했다. 당시 야구부에 가입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어리다며 받아주지 않았다. 야구부를 대신해서 들어간 게 축구부였다. 박지성은 당시 야구부에서 받아 주었다면 이후 계속 야구를 해서 야구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훗날을 생각해 봤을 때 야구부가 박지성을 안 받아준건 행운이었고 개인적인 축구팬으로서 너무 감사하다.
축구를 하기 위해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를 시작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가 되기까지 그의 선수 커리어는 탄탄대로 일듯 보였지만
사실은 축구선수가 되지 못할뻔하였다. 그는 중학교 시절 체격이 너무 작아 감독이 '축구를 좀 쉬면 어떻겠느냐'라는 말에 축구를 못할까 봐 두려웠다. 집안에 반대도 심하여 방문을 닫고 3일 동안 방에서 안 나온 일화도 있었으며 박지성이 축구를 하겠다는 완강한 태도에 결국 축구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키가 클 수 있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먹었는데 개구리를 물에 끓여서 먹기도 하였다. 박지성의 어머니가 개구리 요리를 할 줄 몰라 그냥 물에 끓여서 주셨고 너무 비려서 토를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녹용 사슴피등 먹기 정말 싫었지만 체격을 키우기 위해 어쩔수 없이 먹었다. 그가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다. 그는 수원공고 시절 막 창단된 수원 삼성의 볼보이를 하면서 꿈을 키웠다. "난 언제 저기서 경기를 뛰어보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볼보이는 훗날 대한민국 축구사에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낙동강 오리알
6.25 전쟁 때 낙동강 전투에서 패한 인민군들의 처량한 신세를 오리알에 비유하게 되면서 '낙동강 오리알'이란 말이 처음 나오게 되었다. 박지성이 그랬다. 박지성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하고 싶었으나 입단 테스트에 실패하였다. 3순위조차 거론조차 되지 않았고 그래서 대학교에 입학을 알아보던 중 대한민국 어떤 대학도 박지성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말이 딱 맞았다. 당시 수원의 스카우트였던 정규풍은 당시 박지성의 피지컬이 타 선수들에 비해 약해서 크게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영입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지성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선수가 아니구나라고 생각을 했었다. 나는 분명 잘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정을 안 해주는 거에 대한 충격은 굉장히 컸다.'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박지성을 눈여겨본 김희태 감독이 축구부 선발을 끝낸 뒤였는데 테니스부의 TO를받아 정말 억지로 억지로 박지성을 명지대 축구부로 데려온다. 정말 딱 한 군데의 대학에 어렵게 붙었고 그는 다시 축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축구선수 박지성
어느 날 올림픽대표와 명지대의 친선경기가 잡혔다. 여기서 엄청난 사건이 생긴다. 70M쯤 되는 거리를 박지성 혼자 올림픽대표 선수 상대로 5명을 제치고 골을 넣은 사건이다. 당시 올림픽대표 감독이었던 허정무 감독에 눈을 사로잡았다. 이후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가 훈련을 받게 된다. 명지대 김희태 감독이 말을 했다. '대학도 못 갈 뻔한 선수가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이 되었다! 이건 기적이다!'라고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김희태 감독이 없었다면 박지성은 축구를 못했을 수도 있는 아찔한 일이 생겼을 거 같다. 김희태 감독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표팀에 들어간 박지성에게 일선 지도자들이나 혹은 미디어 담당 기자들의 비판이 이어졌다. 대학도 못 들어갈 뻔한 선수가 올림픽대표 선수가 되었다고 허정무의 선수선발 기준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보기 좋게 틀렸다는 걸 증명이라도 한 듯 훗날 2002년 월드컵 대표 선수로 발탁이 되어 포르투갈전에 골을 넣었다. 이골은 월드컵 베스트 골에 선정되어 대한민국이 월드컵에 넣은 골 중에 가장 멋진 골이 되었다. 그는 이제 어엿한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월드컵에서 박지성이 속한 대표팀은 월드컵 4강이라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다.
야유가 환호로 바뀌는 순간
박지성의 꿈은 이뤄졌다. 축구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하지만 더 높은 수준의 축구를 경험해 보고 싶어 유럽리그를 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박지성에게 기회가 왔다. 월드컵 국가대표를 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을 눈여겨 보고 러브콜을 보낸것 이다. 네덜란드의 강호 PSV 아인트호벤에서 뛸 수 있는 기회였다. 그 기회를 잡고 PSV에 입단한 박지성은 입단하자마자 위기가 찾아온다. 데뷔하자마자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다. 무릎 때문에 제대로 경기를 뛸 수 없었던 박지성은 홈 팬들에게 야유를 받게 된다. 박지성이 공을 받을 때면 야유가 나왔다. 그 야유가 어느 정도였냐면 상대편 선수에게 보내는 야유보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선수인 박지성에게 더 크게 나왔다. 박지성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PSV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한다. 처음으로 축구를 하면서 공이 오는 게 두려웠다. 축구를 시작해서 정말 축구를 하기 싫다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일본 리그에서 영입 제안이 왔을 때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박지성은 다짐한다. "무릎 부상 때문에 내 진짜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다 만일 내가 100퍼센트 실력을 다 보여줘도 너희들이 그때도 야유를 보낸다면 그땐 팀을 떠나겠다."라고 말이다. 계속된 야유 속에서도 박지성은 엄청난 노력으로 슬럼프를 극복해 나갔고 '위송빠르크' 라는 박지성의 축구 응원가도 생겼다. 이어 네덜란드 리그 우승에 이어서 유럽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팀을 올렸다. 당시 최고라 불리던 AC밀란 상대로 골까지 넣으며 다시 한번 축구 선수로서 증명을 해낸다. 야유가 환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후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을 해 프리미어리그 우승 4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라는 엄청난 업적을 남긴다. 그의 축구 인생을 보면 축구를 못할 수도 있는 고난도 많았고 언제나 그 고난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말한다. "진정한 스포츠맨이라면 칭찬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 쏟아지는 비난에 상처받지 않는 심장을 가져야 한다."이 말은 스포츠를 하는 사람뿐 아니라 위대한 일을 도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오늘은 쓰러져도 포기만 안 하면 이뤄낼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 내 인생의 영웅 박지성에 대해 포스팅을 하며 나 또한 많은 동기부여를 받았다. 그가 어떤 일을 하던 그의 행보를 응원하며 앞으로 박지성에게 진심으로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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